
두 兩: 하나만 고르라는 법은 없다
- 지현(성소수자위원회 운영위원)
‘양성애’를 상징하는 프라이드 플래그에는 3개의 색상이 있다. 위의 분홍색은 동성애, 아래의 파란색은 이성애, 그리고 중간의 보라색은 둘 이상의 성별을 사랑함을 뜻한다. 두 색상이 겹쳐 세 개의 색을 이룬 이 상징은 양성애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최근에는 범성애, 다성애 등 둘 이상의 성별에 끌림을 느끼는 지향성들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발상에서 출발해, 이들을 한데 모아 ‘바이플러스(Bi+)’라고 부르기도 한다.
흔히 양성애라고 하면 여성과 남성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설명은 직관적으로 양성애란 무엇인지 정의했다는 점에서 꽤나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논바이너리의 존재를 빼놓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결코 적확하다고 말할 수 없다. ‘양성’이란 두 개의 성별을 뜻하지만, ‘여성과 남성’이라는 뜻을 항상 가지지는 않는다. 예컨대 논바이너리와 여성에게 끌림을 느낀다면 그 또한 양성애라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존재로서 성별 이분법에 저항하는 논바이너리가 있다. 그리고 그 존재를 인식하며 논의를 이어가는 것이 ‘바이플러스’ 이해의 초석이 될 것이다.
양성애자에 대한 편견은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도 유의미하게 존재한다. 성소수자 커뮤니티 안팎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이들을 ‘언제든 정상성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로 호명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이성애’라는 규범을 수행하는 시스젠더 양성애자라면, 밝히지 않는 한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역사에 남을 희대의 변절자(?)로 각인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정상성 수행이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을까? 어떤 양성애자는 그저 좋아하는 이와 관계를 맺었을 뿐인데, 상대의 성별에 따라서 사회적 시선이 뒤바뀐다. 겉으로는 정상 규범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가 경험한 것과 거기에서 비롯된 여러 가치관과 태도 등은 ‘퀴어한’ 것이 된다.
성적/연애 지향과 관계 지향은 완전히 별개이다. 출신 지역과 나이가 아무 관련도 없듯, 양성애자라는 사실은 양성의 사람과 동시에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모노아모리인 양성애자가 존재하고, 또 폴리아모리인 남성애자가 있을 것이다. 이런 반례로 보았을 때 양성애=폴리아모리 공식은 성립할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차별과 편견에 대항한다면, 나는 충분히 다른 사람의 ‘앨라이’가 되어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 만약 양성애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면, 그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무의식 중에 편견을 가지고 양성애자를 대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가시화’라는 건 단순히 ‘이 사람들이 실존한다’라고 선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존재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갈지, 어떤 태도를 취할지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
두 兩: 하나만 고르라는 법은 없다
- 지현(성소수자위원회 운영위원)
‘양성애’를 상징하는 프라이드 플래그에는 3개의 색상이 있다. 위의 분홍색은 동성애, 아래의 파란색은 이성애, 그리고 중간의 보라색은 둘 이상의 성별을 사랑함을 뜻한다. 두 색상이 겹쳐 세 개의 색을 이룬 이 상징은 양성애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최근에는 범성애, 다성애 등 둘 이상의 성별에 끌림을 느끼는 지향성들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발상에서 출발해, 이들을 한데 모아 ‘바이플러스(Bi+)’라고 부르기도 한다.
흔히 양성애라고 하면 여성과 남성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설명은 직관적으로 양성애란 무엇인지 정의했다는 점에서 꽤나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논바이너리의 존재를 빼놓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결코 적확하다고 말할 수 없다. ‘양성’이란 두 개의 성별을 뜻하지만, ‘여성과 남성’이라는 뜻을 항상 가지지는 않는다. 예컨대 논바이너리와 여성에게 끌림을 느낀다면 그 또한 양성애라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존재로서 성별 이분법에 저항하는 논바이너리가 있다. 그리고 그 존재를 인식하며 논의를 이어가는 것이 ‘바이플러스’ 이해의 초석이 될 것이다.
양성애자에 대한 편견은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도 유의미하게 존재한다. 성소수자 커뮤니티 안팎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이들을 ‘언제든 정상성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로 호명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이성애’라는 규범을 수행하는 시스젠더 양성애자라면, 밝히지 않는 한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역사에 남을 희대의 변절자(?)로 각인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정상성 수행이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을까? 어떤 양성애자는 그저 좋아하는 이와 관계를 맺었을 뿐인데, 상대의 성별에 따라서 사회적 시선이 뒤바뀐다. 겉으로는 정상 규범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가 경험한 것과 거기에서 비롯된 여러 가치관과 태도 등은 ‘퀴어한’ 것이 된다.
성적/연애 지향과 관계 지향은 완전히 별개이다. 출신 지역과 나이가 아무 관련도 없듯, 양성애자라는 사실은 양성의 사람과 동시에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모노아모리인 양성애자가 존재하고, 또 폴리아모리인 남성애자가 있을 것이다. 이런 반례로 보았을 때 양성애=폴리아모리 공식은 성립할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차별과 편견에 대항한다면, 나는 충분히 다른 사람의 ‘앨라이’가 되어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 만약 양성애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면, 그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무의식 중에 편견을 가지고 양성애자를 대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가시화’라는 건 단순히 ‘이 사람들이 실존한다’라고 선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존재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갈지, 어떤 태도를 취할지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